오늘의 봄,



신학기 같았던 온화한 날씨였다. 두꺼운 외투라면 조금 더울 정도였고, 한 겹만 입기에는 조금 추운 그런 날씨.


아직 어색한 사이의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여전히 어색한 사이인 채로 취해갈 것만 같은 날이었다.

이름도 아직 못 외웠고, 나이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몇 잔이고 술을 따르고 마신다. 몇 번이고 게임에 져서 마시고 또 마시게 된다.

어지럽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도 즐겁다. 미래의 내가 무엇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생각 없이, 벚꽃잎이 내릴지도 모르는 밤 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이 행복하다.

이름을 불렀다가. 선배라고 불렀다가.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주 짧은 나이차에서 오는 거리감. 미세한 설레임과 긴장감.

그렇게 다시 봄이 다가온다.



어젯밤 merry go round



어젠 그랬다. 세상의 불운이 온통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울한 일, 슬픈 일, 불쾌한 일, 귀찮은 일. 자존감을 잃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잠시 숨을 돌리는가 싶으면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정신 없이 두드려 맞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잠이 들었고 아침이 오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 전에 다짐했다. 이젠 조금 덜 참고, 하고 싶은 말들을 하자. 라고.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내 그림자도 점점 옅어져서 사라질 것 같았다. 셀로판지처럼 투명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일 년 전의 나는 하코다테에 있었다. 다음날이 되자 사라진 야끼토리집과 중국인으로 가득한 로프웨이가 있었다. 십여년 만에 삐에로 햄버거를 먹었고 밤엔 해물로 된 국물요리랑 맥주를 마셨다. 건너편에 앉았던 노신사가 혼자서는 다 먹을 수 없는 만큼의 요리를 주문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깊어진 밤엔 칵테일을 조금 더 마셨고, 그곳은 항상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일의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또 많은 사람들과 이별을 한다. 그리고 그 이별은 대부분 영원한 이별이 된다.

아직도 권태와 이별이 두려운 나는 너무나 많은 말들을 참고 말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이별도 없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침묵은 더 큰 오해의 늪을 만들고, 돌이켜 보면 운명의 방향은 내가 결정짓는 것이 아니었다.

어리석었고, 겁이 많았다.

지금 당장 크게 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은 변해보려고 한다. 시간이라든가 나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걱정하는 동안에도 운명은 시시각각 뒤바뀌어 간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하고 싶은 것도, 해야만 하는 일도 많다.

스무살, 가장 처음 다짐했던 웃음처럼.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한다.



- merry go round

집에 오는 길. 엉엉 울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이나 된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이면서 몇 키로나 걸었다.

눈이 내린다고 그랬다. 보진 못했지만 아스팔트는 축축한 냄새를 풍겼다. 참. 오래된 이야기다.

너무 많은 말들을 참아서,

너무 많은 마음들을 숨겨서,

이제 어떤 것 부터 꺼내야 할지, 꺼내어도 되는 건지.

무섭고 두렵다.

사랑받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요절해도 좋으니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싶다.

언젠가, 언젠가.

온전히 살아있고 싶다.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

. merry go round


언젠가부터 거절이 두려워졌다. 거절을 당하는 것 보다 내 쪽에서 일들을 마무리 짓는 것이 익숙해져서 결국 아무 것도 매듭짓지 못 하고 끝내는 일이 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검푸른 심해와 같은 무게를 가진 허망함이 한 없이 밀려온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여러가지 상황을 들어 합리화한다. 며칠인가 지나면 돌아온다. 예상치 못한 때에 누군가 들추지만 않는다면 대체로 그런 기억들은 지붕에 쌓인 눈처럼 서서히 녹아 사라진다. 남는 건 약간의 얼룩 정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무섭고 겁이 많아지고, 운신도 좁아졌다.

스물 셋의 내가 어땠는지 기억해보려고 했는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설렘을 가지고 있었는지. 허공에 뜬 구름처럼 이리저리 형태를 바꾸다 어느새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돌아오는 구름들은 그 때 놓쳐버린 모습과는 조금도 닮아있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가지지 못한,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하고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것들.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형태.

나는 항상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은 무게로 나를 찾고 있는 사람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지독하게 외로운 밤이 지나고 비슷한 아침이 몇 번이고 반복 됐다. 긴 긴 잠을 자는 습관이 생긴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이리라.

아- 슬프다.


살다 merry go round




특별한 일은 없다. 대체로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잠깐 일어났다 다시 잠이든다. 다시 잠들지 못 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조금 더 피곤하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차를 가지고 스튜디오를 향한다. 아닌 날은 걷는다. 나흘간 일본에서 온 클라이언트와 촬영이 있었다. 외부에서 봄처럼 촬영해야 했던 덕분에 스텝들이 고생했다. 특히 모델은 무척 추웠을 것이다.


매거진 촬영 중에 오랜만에 만난 기자님이 결혼 안 하냐고 물었다. 최근엔 질문이 여자친구가 있는가 없는가에서 기혼과 미혼의 확인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서글프기 그지 없다. 기자님은 결혼을 끊었다고 했다. 다들 바쁜 모양이다.

며칠전엔 아직 고등학생인 꿈을 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몇 년인가 유급 상태였고 아직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꿈에선 왠지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올해를 마지막으로 반드시 학교를 나가야 한다는 설정이 있어서 그 부분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프게 다가왔다.

꿈이라든가 사랑, 희망, 동료, 친구 이런 것들.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현실을 꿈꾸면서도 현실엔 이런 것을 추구하다는 바보같은 취급을 당하게 될 때가 있다.

발을 딛고 있는 이 바닥은 너무 차가워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내가 바보가 되고 만다. 날을 세우고 어깨에 힘을 주고 있어야 겨우 나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지치고만다.

홋카이도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요즘 더 많이. 너무 다시 가고싶다. 길도 평원도 하늘도 건물도 새하얀 겨울. 희미한 라디오소리와 여자의 목소리. 모든 소리를 삼키는 그곳의 눈.

사소하게 남겨진 기억들은 긴긴 시간 긴긴 그리움을 몰고온다.

거기에 있는 걸까. 당신은 혹은 너는. 어딘가에 있다면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도 얼마나 행복할까. 막연한 바람. 기다림 운명이나 꿈. 차가운 순간들. 의미없을 것 같은 순간의 나열들은 오후의 먼지처럼 반짝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나의 사랑. 아직 남아있는 걸까. 네가 누구든.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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