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하는 날 merry go round



며칠째 새벽이라고도 부르기 너무 이른 시간에 잠이 깬다. 방심했던 미세한 근육통이 담결림이 되어서 괴롭히는 탓인데, 목과 왼쪽 등에 중점적으로 포진 돼 있었던 통증이 점차 나아지면서 엷고 넓게 퍼지고 있다. 약하다고 해도 통증은 통증인지라 불편하기그지 없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아침이다. 누워있는 자세가 불편해서 대충 베개를 눕고 잠이 든 탓에 머리는 벼락 맞은 덤불 숲 같다. 미루던 이불 빨래를 돌리면서 어제 오후에 세탁해 둔 세탁물들을 개어 정리했다. 더러워진 욕실 거울과 방안의 전신 거울도 닦았다. 배수구에 얽혀있는 머리카락도 버렸다. 바닥에 뒹굴고 있던 몇 개의 전단지와 페트병을 분류해서 버리고 환기를 시켰다. 열린 방충망 사이로 파리도 한 마리 들어왔다. 귀찮게. 

그러고보니 어린이날이다. 문득 어린이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어떠한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부모님은 맞벌이에 이른 아침에 나가서 나와 동생이 잠들거나 혹은 잠들기 직전에나 들어오시곤 했다. 아빠는 사업을 하던 탓에 딱히 휴일도 없었다. 어디에나 있는 그런 가정이었다. 그런 것에 대해 아쉽다거나 서운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다. 스스로가 처한 상황은 대체로 당연하게 받아드리게 된다.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아무튼 공휴일인데 내가 하는 일도 딱히 휴일은 없어서 오후엔 스튜디오에 나가서 정리를 조금 하다가 투표를 미리 할 생각이다. 선거날 바쁜 일은 없지만 생각보다 지정된 투표소가 멀리 있었다.

생각보다 여름이 빠르게 다가왔다. 건너편 집 옥상에서 팔짱을 끼고 바싹 벼르고 있는 것 같다. 더운 건 너무 싫은데, 여름 밤의 맥주는 좋다.

이불 빨래가 다 되었다. 잠시 빨래를 널고,

가끔 그때 재회 했었던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한다. 여자친구가 되었던 것도 아니지만 때때로 생각난다. 우리의 관계는 어느 순간 특별한 계기도 없이 끊어지게 됐다. 아마도 서로에게 확신이랄까 그런 것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지나고나서는 사소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립기도 하고. 연락을 한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 옅은 지문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손이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가늘고 긴, 혹은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

얼굴은 많은 것을 숨길 수 있지만 손에선 숨길 수 없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다. 사람의 사소한 습관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예전에 만났던 여자아이중에 공부할 때 필기를 무척 열심히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오른손 검지에 줄곧 작은 굳은살이 남아있었다. 예쁜 손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만은 기억난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가장 예쁜 손을 가졌던 여자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손은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에로틱한 부분이야." 라고.

아무튼 여러가지 이유로 손이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손이 예쁜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저녁을 먹으러 집을 나서서 길을 걷다보면 새삼 사람들이 많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도 새삼 사람들이 많다. 익숙했던 풍경인데 사소한 생활의 변화로 마주하는 일이 적어졌다. 조금 편해졌지만 조금 더 외롭다.

세차도 해야 하는데...

 슬슬 나가봐야겠다.



봄이 참, merry go round



희미한 라디오 소리에 눈을 떴다. 몇 년 째 변함 없는 침대. 그동안 몇 번인가 시트 커버를 갈았다. 취향이나 얼룩 같은 이유가 아니라 해어져 망가지는 부분이 생겨서였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공간. 시간을 보고, 날씨를 보고, 세탁기 전원을 켰다.

그러고보니 사월이었다. 오늘은 22일. 잠깐 후쿠오카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제법 무덤덤하게 보낸 사월이었다. 누운채로 커튼틈을 벌려 창밖을 봤다. 빛도 좋고, 어린 녹색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사월은 특별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게 적확 한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 아직 사월임을 깨닫고 창 틈으로 본 풍경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아주 옅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리라. 

일순 벚꽃이 피었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몇 번인가 비가 내리는 날이 이어지더니 길에선 익숙한 봄 냄새가 났다.

고백하자면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이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나는 이렇게 무뎌지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인가 하는, 잘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심하게 요동치던 감정의 폭이 적어진 것이, 쉽게 단념할 수 있게 된 것이, 결국은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기 위했던 최소한의 방어기제 였던 것 같기도 하다.

더위에 몹시 약한 나는 얼마후면 전부 잊은 채 더위를 피해서 다닐 궁리만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젠 무엇인 그리운 것인지 제대로 말해낼 수 없다.



금요일 merry go round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차 안에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여기저기 전화 통화를 했다.

연결이 된 사람도 있고 안 된 사람도 있다. 소극적인 금요일의 마음은 벨소리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대부분 종료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음은 몹시 서글펐다.

후쿠오카에서 돌아온 이후로 심각하게 외로움을 탄다.

차창 너머의 의미없는 풍경에도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나는 당장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할지 조금도 모르겠다.

사실 정말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에겐 전화할 수 없었다.

우리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고,

텅 빈 순간에도 다시 만나기엔 너무 서글픈 존재가 되고 말았다.

봄인가 싶었는데,

언제 봄 같은 것이 있었냐는 듯이 비가 내린다.


다시 봄, merry go round



나는 너에게 더 솔직하면 좋았을텐데.


그때는 왜 그럴 수 없었을까.

사월 merry go round



슬프다. 사월은 항상 슬펐지만 유난히 슬프다. 나는 나이가 들었고, 더는 젊어 보이지 않는다. 또래의 사람들은 모두 증발한듯 사라져버렸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가질 수 없고 닿을 수도 없다. 봄이 오면 나아질까, 겨울이오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바람 같았던 말들은 모두 사월 첫날의 거짓말 같다.

내가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아도 계절은 변하고 당신은 살아간다.

당신은 왜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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